제주의 자연과 음식이 선사하는 놀라운 이야기, 이제 직접 만날 시간이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인기가 식지 않는 봄, 제주에서는 유채꽃과 벚꽃이 만개하여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제주로 향하는 발걸음은 더욱 설레고, 과거 드라마 속 주인공 ‘애순’과 ‘관식’이 머물렀던 제주의 풍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방송작가로서 전국 곳곳을 다녔지만, 제주만큼은 특별하고 비밀스러운 곳으로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처음에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나지막한 오름에 반해 아이가 어릴 때 제주에서 한 달 살아보기도 했다. 용눈이오름, 백약이오름, 금오름, 새별오름 등 오름을 누비고, 계곡에서 책을 읽거나 곶자왈을 거닐고, 저녁에는 바다에 몸을 담그던 젊은 날의 추억이 생생하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제주를 찾는 관광객 수가 줄었지만, 제주가 국내 여행 1번지로서의 매력을 잃은 것은 아니다. 높은 물가 등 몇 가지 이슈가 발목을 잡기도 하지만, 제주는 여전히 이름값을 하는 매력적인 땅이다. 특히 10년 만에 다시 찾은 ‘용머리해안’은 로컬100에 선정된 제주의 소중한 유산으로서 제주 여행의 백미라 할 만하다. 아직 제주 사람 중에서도 용머리해안의 가치를 모르거나, 방문 시기를 놓쳐 가보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용머리해안은 바닷물이 빠지는 물때에 맞춰 방문해야 하며, 날씨가 좋지 않으면 입장이 제한될 수 있으므로 매일 오전 9시부터 문을 여는 관광안내소에 입장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필수다.
미끄럽지 않은 편안한 신발을 신고 용머리해안으로 향하면, 서귀포시 안덕면에 이르기 전부터 시선을 사로잡는 거대한 산방산이 웅장하게 펼쳐진다. 산방산은 설문대 할망이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던진 돌산이라는 신화가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한라산보다 먼저 생성된 지질학적 특징을 보여주는 곳이다. 산방산과 더불어 제주의 지질학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용머리해안은 한라산과 산방산, 그리고 제주 본토가 생기기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화산체, 즉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땅이다. 약 100만 년 전 얕은 바다에서 화산 폭발이 일어나며 형성된 이곳은, 수성화산 분출이 간헐적으로 여러 분화구에서 계속되면서 독특한 화산재 지층을 만들어냈다. 오랜 시간 파도에 깎이고 다시 화산재가 쌓이는 과정을 거치며 만들어진 용머리해안은 제주 최초의 땅이자 태곳적 땅으로서 압도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용머리해안은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그 웅장함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용암과 바다, 그리고 시간이 빚어낸 풍경 앞에서 100만 년 세월의 장엄한 무게를 느낄 수 있다. 검은 현무암과 옥색 바다가 기묘하게 얽힌 이곳에서는 작은 방처럼 움푹 들어간 굴방과 드넓은 암벽의 침식 지대가 장관을 연출하며, 오랜 세월 쌓인 사암층과 파도가 깎아낸 해안 절벽의 모습을 시원하게 감상할 수 있다. 안덕면 사계리와 화순리 경계에 위치한 용머리해안은 바위가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영험한 기운이 서려 있어, 진시황이 사자 고종달을 보내 용의 혈맥을 끊으려 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산방산을 마주한 용머리해안에 서면, 마치 산방산의 절규와 눈물을 밟고 선 듯 오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용암 증기가 빠져나가며 생긴 구멍들과 시루떡처럼 층층이 쌓인 지층은 제주 최초의 속살을 만나는 듯한 환희를 선사한다.
바닷물이 철썩이는 곳에서는 거북손과 갖가지 어패류들이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으며, 제주 할머니들이 멍게, 해삼 등을 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거대한 자연 앞에서 짧은 인생은 겸손해진다. 용머리해안을 거닐며 사진을 찍다 보면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이곳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은 단연 고사리해장국이다. 화산의 땅 제주에서는 물과 곡식이 부족하여 가난이 컸지만, 오랜 시간 제주를 먹여 살린 두 가지 작물은 고사리와 메밀이었다. 척박한 화산암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빗물을 저장했던 고사리는 제주 생태계와 식재료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독성이 있지만, 우리 민족은 예부터 고사리를 삶아 말려 독성을 제거한 후 즐겨 먹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제주에서 고사리의 귀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제주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여동생은 고사리 채취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챙겨준다. 고사리는 날 때 톡톡 끊어주면 여러 번 수확할 수 있어, 산과 들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노력을 짐작할 수 있다. 고사리해장국은 제주 사람들의 ‘소울푸드’다. 예부터 소보다 돼지를 더 친근한 가축으로 여겼던 제주에서는 잔치에 돼지가 빠지지 않았다. 돔베고기를 먹고 남은 돼지 뼈로 곤 육수는 다양한 요리에 활용되었다. 모자반을 넣으면 ‘몸국’, 뼈를 넣으면 ‘접작뼈국’, 그리고 고사리를 넣으면 ‘고사리해장국’이 된다. 육지의 육개장에서 고사리가 소고기를 대신하는 것처럼, 제주 고사리해장국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가루와 어우러져 걸쭉하면서도 은은한 감칠맛을 자랑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사리해장국은 메밀가루 때문에 약간 갈색빛을 띠지만, 한 숟갈 떠 입에 넣으면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메밀 전분이 풀어져 걸쭉한 국물은 전혀 자극적이지 않으며, 고사리와 메밀의 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제주 생활 5년 차인 여동생은 이 맛을 ‘베지근하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고기를 푹 끓인 국물이 구미를 당길 정도로 맛있다는 의미다. 기름진 맛이 깊으면서도 담백하여 속을 든든하게 채워준다는 뜻으로, “국물 맛이 베지근하우다!”는 최상급 칭찬이다. 밥 한 공기를 말면 더욱 걸쭉해져 죽처럼 되직한 고사리해장국은 입에 걸리는 것 없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담백하고 유순한 맛을 낳은 제주 사람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고사리해장국집 창 너머로 유채꽃이 일렁이고 우뚝 솟은 산방산이 보인다. 산방산 아래 엎드린 용머리해안도 그려진다. 오늘만큼은 고사리해장국 한 그릇으로 100만 년 제주의 시간을 관통하는 듯하다. 자연, 인간, 식당 주인장, 그리고 타향살이를 견디며 언니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 여동생까지, 우리 모두 “폭싹 속았수다(수고하셨습니다).”
◆ 제주 사계리 용머리해안
주소: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112-3
영업시간: 연중 상이 (*입장 시간 확인 필수)
문의전화: 064-760-6321
주차장 있음, 제주도민 외 입장료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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