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권, 12위로 추락… 이제 ‘신뢰’가 여행의 기준이 된다

20년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여권 자리를 지켜왔던 미국 여권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헨리 여권지수가 발표한 최신 순위에서 미국 여권은 처음으로 최상위 10위권 밖으로 밀려나 말레이시아와 함께 공동 12위를 기록했다. 이는 2014년 부동의 1위를 차지했던 위상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제 더 이상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여권의 힘을 결정하는 시대는 지나갔으며, ‘신뢰’를 바탕으로 한 국가 간의 관계가 중요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미국 여권이 12위로 하락한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과거에는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많은 국가에서 미국 여권 소지자에게 무비자 입국을 허용했다. 그러나 최근 미국이 외교적으로 내향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이러한 흐름에 변화가 생겼다. ‘미국 우선주의’ 정책은 결국 ‘미국 고립주의’로 이어졌고, 이는 브라질, 베트남, 중국 등 주요 국가들이 미국 여권 소지자에 대한 무비자 입국을 제외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즉, 정치적 고립이 곧 여권의 이동성 쇠퇴로 이어진 것이다.

반면, 아시아 국가들은 ‘신뢰’를 바탕으로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싱가포르, 한국, 일본 등은 최상위권을 차지하며 ‘이동성 패권’을 장악했다. 이들 국가의 강점은 투명한 행정, 경제적 신뢰, 그리고 글로벌 협약을 성실히 이행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또한, 중국 역시 10년 만에 헨리 여권지수 순위가 94위에서 64위로 크게 상승하며 무비자 입국 허용국을 37개국 늘리는 등 ‘폐쇄된 대국’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개방적 파트너’로 변화하고 있다. 이는 국제 사회가 ‘힘이 센 나라’보다는 ‘함께할 수 있는 나라’, 즉 ‘신뢰를 쌓고 있는 나라’에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 국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을 넘어 ‘글로벌 드림’을 추구하며 미국인들 사이에서 ‘제2의 여권’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헨리앤파트너스에 따르면, 올해 미국인의 투자 이민 신청 건수는 전년 대비 67%나 증가했다. 이는 국적이 더 이상 태어나는 순간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인 선택의 중요한 자산이 되는 시대로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헨리 여권지수의 순위 하락은 단순히 여행할 수 있는 목적지가 줄어든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이는 국가 간의 ‘신뢰’라는 새로운 외교적 비자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여권은 국가의 신용 등급이자 외교적 신뢰를 증명하는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문을 닫는 나라’는 결국 ‘닫힌 문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확히 인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