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0일

나도 이제 편하게 나이 든다: 살던 곳에서 존엄하게 늙는 삶, 어떻게 가능할까?

이제 대한민국에서 나이 드는 것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 전체의 구조를 바꾸는 중요한 과정이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많은 시민이 일상생활의 기반이 되는 주거, 지역, 서비스 체계가 ‘젊고 건강했던 시절’에 맞춰져 있어 나이가 들수록 삶이 불편하고 불안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 필요한 것은 단순히 ‘고령자 지원’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사회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이다. 즉, ‘장소에 머무는 상태’가 아닌 ‘시간에 따른 과정’으로서의 고령화에 대응하는 생활환경의 변화가 시급하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고령자’라는 특정 대상만을 겨냥한 정책에서 벗어나, 모든 국민이 생애주기 전반을 통합적으로 설계하는 사회적 전환이 필요하다. 현재 많은 정책과 제도는 돌봄, 건강, 주거 등의 복합적인 문제를 분절적으로 다루고 있어 유기적인 연계가 부족한 실정이다. ‘살던 집에서 나이 들기(Aging in Place)’라는 이상적인 목표도 실제 삶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건강 상태 변화, 돌봄 필요 증가 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진적으로 혹은 급격하게 나타나는데, 기존 주거지가 이러한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면서 고령자의 삶이 특정 공간에 고립되고 사회적 자원과의 연결 가능성이 차단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에 따라 이제는 ‘장소에 머무는 노화’에서 ‘과정에 대응하는 생활환경’으로의 전환이 절실하다. 고령화는 고정된 공간이 아닌 과정이므로, 대응 역시 유연한 생활환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주거 공간이 변화에 적응하고, 복지 서비스가 연계되며, 이동성과 사회적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일상의 기반 마련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이러한 변화는 고령자만을 위한 정책이 아닌, 모든 세대가 ‘나이 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 ‘고령친화도시’를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 이는 오늘의 청년, 중년, 노년 모두가 각자의 시점에서 미래의 도시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외에서는 이미 고령화 대응의 방향이 ‘공간에 머무는 것’에서 ‘함께 살아가는 관계망의 재구성’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에서 발전한 NORC(Naturally Occurring Retirement Community)는 자연스럽게 고령자가 밀집된 지역을 기반으로 건강관리, 주거관리, 커뮤니티 프로그램 등을 통합적으로 제공하며 ‘어디에 사는가’보다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중요시한다. CCRC(Continuing Care Retirement Community)는 건강 상태에 따라 연속적인 돌봄이 가능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삶의 전환에 따라 적절한 환경이 유기적으로 제공된다. UBRC(University-Based Retirement Community)는 대학 캠퍼스와 연계하여 세대 간 교류, 평생학습, 건강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삶의 의미와 소속감을 부여한다.

이러한 해외 사례들은 모두 고령화라는 과정을 ‘삶의 통합적 변화’로 인식하고, 주거, 의료, 사회적 자원들을 ‘동선 위에서 엮어내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대한민국 사회 역시 그동안 ‘시설’과 ‘재택’이라는 이분법적 틀에 갇혀, 그 사이 존재하는 수많은 삶의 전환 지점과 필요한 서비스의 연속성을 간과해왔다. ‘계속 그 집에 살아야 오래 사는 것’이라는 단선적인 생각은 오히려 주거 이전이나 환경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고 서비스 미이용이나 방치로 이어질 수 있다.

고령자의 삶은 신체 기능 저하, 배우자 사별, 소득 변화, 돌봄 필요 증가 등 시간과 함께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역동적인 변화의 연속이다. 따라서 주거와 복지, 보건의 영역은 이러한 변화에 유기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이제는 ‘살던 집에 머무르는 것’을 절대적인 목표로 삼기보다, 고령자의 변화에 맞춰 주거와 서비스가 함께 이동하고 조정될 수 있는 유연한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역사회 안에서 나이들기’와 ‘지역공동체와 함께 나이들기’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러한 전환의 출발점은 ‘공간의 개념’ 재정의에 있다. 고령자가 살아가는 공간은 더 이상 단독주택이나 아파트라는 물리적 단위에 갇혀서는 안 된다. 지역의 보건소, 도서관, 마을 식당, 경로당, 복지관, 공원, 골목길 모두가 고령자의 삶을 지탱하는 공간이며, 이들의 ‘네트워크’가 고령친화도시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고령자만을 위한 도시’가 아닌, 모두가 나이 들어가는 도시, 즉 전 생애 주기를 포괄하는 ‘연령친화도시’를 정책 목표로 삼아야 한다.

새롭게 출범하는 정부는 이러한 초고령사회에 대한 정책 대응을 고령자 지원을 넘어, 모두가 나이 들어가는 사회 전체를 설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에 머무르지 않고, ‘모두가 나이 들어가는 사회’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할 때다. 진정한 고령친화도시란, 누구나 존엄하게 늙어갈 수 있도록 함께 준비하고, 주거, 서비스, 커뮤니티가 유기적으로 대응하는 시스템으로 삶의 유연성을 지켜주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제 늙음이라는 생애 과정을 ‘견뎌야 할 일’이 아니라 ‘함께 준비할 일’로 받아들이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방향도 바꿔야 한다. 지원이 아닌, 동행을 위한 체계로. 정책이 아닌, 삶의 과정에 반응하는 환경으로.

◆ 고영호 건축공간연구원 연구위원,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민간위원

건축공간연구원 고령친화정책연구센터장, 기획재정부 인구위기대응 TF 고령사회 대응반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민간위원, 국토교통부 인구대응협의체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령자 주거와 복지의 연계, 고령친화 공동체 마을 등에 대한 고령친화 건축도시공간 정책연구 전문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