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9일

나이 들어도 편안한 삶, 이제 ‘함께’ 설계하는 우리 동네가 온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특정 장소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겪는 ‘과정’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단순히 나이 드신 분들을 ‘지원’하는 정책을 넘어, 삶의 과정에 유연하게 반응하는 환경을 함께 만들어가는 ‘동행’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대한민국 사회 전체의 구조를 바꾸고 있으며, 나이가 들어갈수록 삶이 더 불편하고 불안해지는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어떤 혜택을 누릴 수 있을까? 이제 고령화라는 사회적 변화에 발맞춰, 우리 모두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함께 나이 들어가더라도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더 이상 ‘고령자’만을 위한 별도의 정책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생애 주기 전반에 걸쳐 통합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는 사회적 전환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환을 통해 우리는 ‘살던 집에서 나이 들기(Aging in Place)’라는 이상을 넘어, 변화하는 건강 상태와 돌봄, 지원에 대한 요구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환경을 기대할 수 있다. 과거에는 한 사람의 노화가 기존 주거지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정책이 설계되어, 고령자의 삶을 특정 공간에 고립시키고 사회적 자원과의 연결 가능성을 차단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제는 이러한 ‘장소에 머무는 노화’에서 벗어나, ‘과정에 대응하는 생활환경’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집을 바꾸는 차원을 넘어, 삶의 기반 자체가 바뀌어야 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발전한 NORC(Naturally Occurring Retirement Community) 모델은 인위적인 고령자 거주지가 아닌, 자연스럽게 고령자가 밀집된 지역을 기반으로 건강 관리, 주거 관리, 커뮤니티 프로그램 등을 통합적으로 제공한다. 이는 ‘어디에 사는가’보다 ‘어떻게 연결되는가’가 중요하다는 관점을 보여주며, 우리 사회도 이러한 ‘함께 살아가는 관계망의 재구성’으로 나아가야 함을 시사한다.

또한 CCRC(Continuing Care Retirement Community) 모델은 건강 상태에 따라 독립적 거주에서부터 간병이 필요한 단계까지 연속적인 돌봄이 가능한 공간으로 구성된다. 고령자의 삶의 전환에 따라 적절한 환경이 유기적으로 제공되도록 설계된 이러한 모델은 ‘고령자 시설’이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넘어, 삶의 변화를 수용하는 생활환경의 복합체로서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최근 주목받는 UBRC(University-Based Retirement Community) 모델은 대학 캠퍼스 인근 또는 내부에 고령자 주거지를 조성하고, 세대 간 교류와 평생 학습, 건강 프로그램을 연계함으로써 단순한 돌봄을 넘어 지속적인 삶의 의미와 소속감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해외 사례들은 고령화라는 과정을 하나의 ‘삶의 통합적 변화’로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는 주거, 의료, 사회적 자원들을 ‘동선 위에서 엮어내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고령자 주거 복지 정책의 틀을 ‘시설’과 ‘재택’의 이분법으로 구분해왔다. 그러나 이 사이에는 수많은 고령자의 삶의 전환 지점들이 존재하며, 각 지점마다 요구되는 환경과 서비스의 연속성은 제도 밖으로 밀려나기 쉬웠다. ‘계속 그 집에 살아야 오래 사는 것’이라는 단선적인 슬로건은 오히려 주거 이전이나 환경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고, 결과적으로는 서비스 미이용이나 방치로 이어지는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고령자의 삶이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역동적인 변화의 연속임을 인식해야 한다. 신체 기능 저하, 배우자 사별, 소득 구조 변화, 돌봄 필요성 증가 등 시간과 함께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변화에 주거, 복지, 보건의 영역이 유기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따라서 이제는 ‘살던 집에 머무르는 것’을 절대적인 목표로 삼기보다는, 고령자의 변화에 맞춰 주거와 서비스가 함께 이동하고 조정될 수 있는 유연한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역사회 안에서 나이들기(Agin in Place)’와 ‘지역공동체와 함께 나이들기(Aging in Community)’의 진정한 의미가 될 것이다.

그 출발점은 ‘공간의 개념’을 재정의하는 데 있다. 고령자가 살아가는 공간은 더 이상 단독주택이나 아파트라는 물리적 단위에 갇혀서는 안 된다. 지역의 보건소, 작은 도서관, 마을 식당, 경로당, 복지관, 공원, 골목길 모두가 고령자의 삶을 지탱하는 공간이며, 이들의 ‘네트워크’가 곧 고령친화도시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령자만을 위한 도시가 아닌, 모두가 나이 들어가는 도시, 즉 전 생애 주기를 포괄하는 연령친화도시를 정책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앞으로 대한민국이 준비해야 할 초고령사회 대응 전략의 핵심 방향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초고령사회를 현실로 마주하고 있지만, 여전히 고령자의 삶을 고정된 상태로 보는 정책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재택이냐 시설이냐, 복지냐 의료냐 하는 이분법적 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고령화는 진행형의 과정이며, 이에 따라 주거 환경과 서비스 체계도 함께 유기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이러한 대응은 개인의 ‘집’이라는 물리적 경계를 넘어, 지역사회와 도시 전체가 함께 유연하게 전환하는 구조로 확장되어야 한다.

새롭게 출범하는 정부는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에 머무르지 말고, ‘모두가 나이 들어가는 사회’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진정한 고령친화도시란, 고령자만을 위한 도시가 아니라, 누구나 존엄하게 늙어갈 수 있도록 함께 준비하는 도시이며, 주거와 서비스, 커뮤니티가 함께 대응하는 시스템으로 삶의 유연성을 지켜주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늙음이라는 생애 과정을 ‘견뎌야 할 일’이 아니라 ‘함께 준비할 일’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방향도 바꿔야 한다. 지원이 아니라, 동행을 위한 체계로. 정책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 반응하는 환경으로.

◆ 고영호 건축공간연구원 연구위원,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민간위원

건축공간연구원 고령친화정책연구센터장, 기획재정부 인구위기대응 TF 고령사회 대응반 위원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민간위원, 국토교통부 인구대응협의체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령자 주거와 복지의 연계, 고령친화 공동체 마을 등에 대한 고령친화 건축도시공간 정책연구 전문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