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3월 25일

장생포 고래고기, 과거를 씹으며 미래를 준비하는 맛

울산 장생포에서 고래고기를 맛보는 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사라진 산업과 생업, 그리고 포경선의 추억을 되새기는 의미 있는 경험이다. 과거 포경 산업으로 번성했던 장생포에서 고래고기는 이제 도시의 기억과 공동체의 내일을 준비하는 상징적인 음식이 되었다.

장생포는 예로부터 고래가 모이는 깊은 바다이자, 조수간만 차가 적고 강 하류에서 부유물이 풍부하게 유입되어 새우와 작은 물고기들이 많이 모이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녔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 덕분에 많은 고래들이 이곳을 보금자리로 삼았다. 반구대암각화의 고래잡이 그림이나 각지에서 발견되는 고래 뼈, 유물들은 장생포가 선사시대부터 고래와 인연이 깊었던 곳임을 보여준다.

한때 장생포는 고래잡이로 엄청난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수출입 선박이 빼곡했고, 6~7층 규모의 냉동창고가 즐비할 정도로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의 상업 포경 금지 결정으로 장생포의 고래 산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73년 문을 열었던 남양냉동은 1993년 세창냉동으로 바뀌었지만, 경영 악화로 10년도 채 되지 않아 문을 닫았다.

이렇게 쇠퇴하던 냉동창고는 지자체와 시민들의 노력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2016년 울산 남구청은 건물을 매입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2021년 장생포문화창고를 개관했다. 총 6층 규모의 문화창고는 소극장, 녹음실, 연습실 등을 갖춰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거점이 되고 있으며, 특별전시관, 갤러리, 미디어아트 전시관 등 다양한 문화 공간을 제공한다.

문화창고 2층에서는 어린이를 위한 ‘에어장생’ 항공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어 아이들과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또한, 조선 시대 화가들의 작품을 미디어 아트로 재현한 ‘조선의 결, 빛의 화폭에 담기다’ 전시는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새로운 감성으로 일깨운다. 수십 년 된 냉동창고 문을 그대로 살려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는 폐허가 된 공간을 재탄생시킨 업사이클링의 좋은 예다.

특히, 2층에 상설 전시된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기념관’은 울산의 산업 발전 역사와 과정을 보여주며, 중화학공업의 중심지로 한강의 기적을 이끈 울산석유화학단지의 성장 과정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 공간은 당시 울산의 성장을 온몸으로 체험했던 부모 세대에게는 더욱 애잔한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과거 굴뚝 연기로 인한 중금속 중독 질환, 이른바 ‘온산병’의 아픈 역사도 이곳에서 배울 수 있다.

비록 상업 포경은 금지되었지만, 장생포에서는 여전히 고래고기를 맛볼 수 있다. 현재 장생포 고래요릿집들은 대부분 혼획된 밍크고래 등을 합법적으로 유통하고 있다. 가격이 많이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장생포가 아니면 맛보기 힘든 밍크고래의 희소성은 고래고기를 더욱 특별한 음식으로 만든다.

12만 원짜리 ‘모둠수육’은 겉보기에는 육고기와 흡사하지만, 삶은 수육과 생회가 어우러진 다채로운 구성으로 눈길을 끈다. 붉은색의 살코기, 쫄깃한 껍질, 부드러운 혀와 창자, 염통 등 다양한 부위는 각각 고유한 맛과 식감을 자랑한다. ‘일두백미’라 불리는 소처럼, 고래 한 마리에서도 최소 12가지, 어쩌면 스무 가지 이상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특히 고급 부위로 꼽히는 ‘우네’는 턱 아래 가슴 부위의 쭈글쭈글한 모양으로, 대형 고래에서도 소량만 나는 귀한 부위다. 일본어 ‘무네’에서 유래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포경업의 일본 잔재를 엿볼 수 있다. ‘오배기’는 피하지방과 근육층이 겹겹이 쌓인 부위로, 고래 특유의 맛과 식감을 극대화한다. 기름의 고소함과 살코기의 쫄깃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다양한 소스에 찍어 먹는 고래고기는 부위마다, 조리법마다 색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때로는 보쌈처럼 부드럽기도 하고, 다른 부위는 생 조갯살처럼 꼬들꼬들한 식감을 즐길 수 있다. 신선하고 기름기가 적당한 살코기를 철판에 구워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장생포의 고래요릿집은 단순히 고래고기를 파는 식당을 넘어선다. 이곳은 사라진 산업과 생업, 포경선에 대한 향수를 담아내는 공간이다. 고래로 꿈을 꾸었던 어부들, 고래고기로 단백질을 보충했던 이들, 그리고 한강의 기적을 일군 산업 역군들을 기리는 문화적 의미를 지닌다. 장생포의 고래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고래고기를 통해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우리는 이 음식을 통해 과거의 시간을 씹고, 도시의 기억을 삼키며, 공동체의 미래를 준비한다.